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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달구벌 '대구'

행복사냥이 2018. 9. 12. 00:00

알아두면 좋은 생활상식 지명유래

대 구

 

 

Ι 문화와 예술의 도시 '대구'

본래 그 지형적 특성상 전국적으로 여름 기온이 높은 곳으로 유명했던 대구였지만, 올 여름 대구의 이상고온에 대한 관심은 대프리카라는 용어를 널리 확산시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대구의 이미지는 더운 도시보다는 아름다운 여성이 많은 도시였습니다.(최근에는 문화와 예술이 있는 도시로 기억됩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경공업이 발달했던 지역의 특성상 손재주가 뛰어난 여성인력이 모여들면서 미인들이 많은 도시라는 얘기를 어린 시절부터 주변으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있었고, 실제 몇 해 전에 우연히 동성로를 갔다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대구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Ι 달구벌 '대구'

대구라는 총체적인 호칭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지금의 행정구역과 과거 대구의 구획도 많은 변화가 있었죠. 대구에 사람이 정착하고 자연취락이 형성된 시기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기원전 1세기 무렵, 대구에는 지금의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한 달구벌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이사금 15(261)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에 속한 큰 읍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주택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는 87기의 삼국시대 고분들이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대구 달성토성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 2,3동 국채보상로 83길 (출처 : 대구광역시청) 

참고-대구 달성토성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城廓)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왕(沾解王) 15(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조 선조29(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9(689)에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대구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 그 당시 대구의 위상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경덕왕 16(757)에는 위화현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게 됩니다.(당시 당() 문화의 영향으로 신라의 문물제도가 중국식으로 정비되면서 벼슬이름이나 지방의 이름이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됩니다. 당시 음을 따거나, 뜻을 따르거나, 글자를 줄이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던 이러한 개칭과정에서 달구벌의 음을 따 대구로 개칭했습니다.)

참고-대구의 옛 이름

삼국시대(5세기말~6세기초) 대구의 옛 이름은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화(達句火), 달구벌(達句伐)이라 표기 되었는데 ()’(’)은 촌락, 읍성을 뜻하는 말이며, ()은 원(), () 등 넓은 공간을 의미한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수도 경주를 차지하기 위해 팔공산에서 접전을 벌인 공산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대구가 신라 말까지도 왕경인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군사 ·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대구는 농업의 주요 생산지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고, 또한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종 1(1419)에는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세종 30(1448)에는 복지제도인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되어 시범 운영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조 12(1466)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대구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이후 선조 34(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오늘날의 도지사격인 관찰사가 일을 보던 곳을 감영이라고 하는데, 경상감영은 경상좌도와 우도가 통합되면서 지금 대구 달성공원의 위치에 설치되었다가 잠시 안동으로 옮겨진 뒤 당시 안동부에 있던 감영을 다시 대구부로 옮겼습니다), 효종 9(1658)에는 대구객사 주변에 약재시장이 개설되면서 약령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대구는 영남지역의 행정 · 교통 · 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고,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풍루     1890년 경상감영의 문루인 관풍루 (출처 : 대구광역시청)

대구(大丘)가 대구(大邱)가 된 것(한자의 표기가 변화)은 영조 때였습니다.

영조 26(1750)에 대구(大丘)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대구의 구()자가 공자의 이름인 구()와 같은 자이므로 공자의 이름을 지명에 사용하는 것은 불경하다 하여(왕의 이름에 쓰이는 한자를 일반 백성들이 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바꾸고자 상소하였으나 당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조(正祖), 헌종(憲宗)때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가 혼용되다가 철종(哲宗) 이후에는 대구(大邱)만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대구는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해서 수행해 오다가, 1895년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8도에서 23부로 개편됨(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전국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개편 시행)에 따라 대구관찰부가 설치되었고 예하 23개 군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개편(전국 23부제를 폐지하고, 도제(道制)를 부활하여 13도로 개칭)하면서 대구부는 대구군으로 개칭되는데, 부청 소재지(23부제를 시행할 때는 대구부청으로 불렀습니다.)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그 산하기관인 대구이사청이 설치되는 등 일제의 국권침탈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1910년 이사청을 폐지하면서 대구군은 다시 대구부로 바뀌게 되며, 부제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대구 부청     1914년의 대구 부청(현 대구광역시청), 출처 : 대구광역시청

경상북도 도청      1929년 경상북도 도청 (출처 : 대구광역시청)

대구 시가지        1930년 대구부 시가지 전경 (출처 : 대구광역시청)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이듬해 지방자치법의 실시에 따라 대구부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81년에는 달성군의 월배읍, 성서읍,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고산면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대구광역시가 되었고 행정구역의 광역화로 250만 인구에 달하는 영남권 중추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습니다.

대구는 그 도시의 긴 역사만큼이나 돌아볼 곳이 많은 곳입니다.

저 역시 아직 대구와 인연이 없는지 많은 곳을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입니다. (물론 여름철은 제외하고 입니다. ^^)

 

오늘은 조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도움이 되셨죠?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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