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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한국사 능력시험] 42회차 문제와 풀이분석(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4. 10.

우리역사 길라잡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한국사 능력시험 42회차 문제분석

#오늘은 문제풀이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문항도 역시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왕들의 업적을 연결하는 문제입니다. 제시된 지문을 보겠습니다.

3년 순장을 금지하고 처음으로 우경을 하였다.

4년 '신라'를 국호로 삼고, ‘신라 국왕'이라 칭하였다. 

16년 국내의 주, 군, 현을 정하였다.

소는 처음에 시신을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달구지를 만들어 소의 힘을 이용한 나라는 고구려였고, 부여에서는 전쟁을 하기 전, 소를 잡아서 그 발톱의 상태로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소를 이용한 농업을 시행해 그 지혜로움을 증명했던 왕은 신라의 지증왕이었습니다. 순장을 금지했던 것도 우경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확보하고 함이었으며, 이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이사부를 통해 우산국을 복속하기도 했고, 도읍의 동쪽에 시전(시장)의 상행위를 감시하는 관청, 동시전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이 국호에서 신라가 지방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방 제도를 군현제로 개편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군현제’는 중국의 지방 통치 방식으로 '왕'이라는 칭호 역시도 중국식입니다. 지증왕 이전의 신라에서 왕의 칭호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증왕대에 이르러 칭호와 더불어 통치체제가 크게 변화했는데, 이 때문에 왕의 업적을 묻는 문제에 지증왕이 단골처럼 등장합니다.  



 1.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하였다.

첨성대를 축조한 것은 선덕여왕 시기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왕은 단 셋뿐입니다. 이 3인의 여왕은 신라에만 있었는데,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그들입니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놀라운 과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개 역사 속에서 과학이 발달하는 시기는 덕(德)이 많은 왕이 재임했을 때(셋 중 선덕여왕이 가장 높은 칭송을 받았습니다.)입니다.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과 그 이후의 진덕 여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출제 빈도가 높습니다.


2. 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지난번 가야의 건국설화에서 보듯이 가야연맹은 6개 가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섯 중 맏이 수로왕이 건국한 금관가야는 지금의 김해지방에 위치해 전기 가야 연맹의 중흥을 이끌었습니다.(김해 지방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거든요. 철은 농업생산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러던 중 신라를 지원한 고구려군에 의해 금관가야가 약화되고 지금의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를 주축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신라 법흥왕 시기에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30년 뒤 진흥왕 시기에 대가야도 멸망을 하면서 가야 연맹은 해체되었습니다.(공교롭게도 '흥' 많은 왕들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3.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삼국의 역사서 편찬은 신라 진흥왕 때 거칠부에 의해 ‘국사(책의 이름입니다)'가 편찬되었으며, 백제 근초고왕 때 고흥에 의해 '서기'가, 고구려 영양왕 때 이문진에 의해서 ‘신집’이 편찬되었습니다. 역사서가 편찬된 시기의 공통점을 보면 국력이 강했던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자랑거리가 많을 때 책을 쓰죠.)


4.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서기 536년)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은 법흥왕 시기입니다. 지증왕의 지혜로움을 이어받아 왕위에 즉위한 것이 바로 법흥왕입니다. 그 왕명에서 보듯이 법흥왕은 불교식 왕명(법, 진, 선)을 사용하였는데,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며 새로운 기틀을 마련을 법흥왕은 지증왕이 받아들였던 중국식 체제의 수용을 넘어 신라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과시하고자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처음 연호가 등장한 것은 서기전 140년, 한무제 때입니다. 당시의 연호도 '건원'이었습니다. 우리 역사 속 연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최초(영락이라는 연호)로 사용한 이래 몇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중국의 연호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고구려 및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는 건국 이후 줄곧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고려 이후에는 대부분 중국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나 고려 초기를 비롯하여 자주국임을 강조하던 시대 분위기에 따라 독자적인 연호가 제정되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출처 위키백과)


5.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시전을 설치한 것은 소지마립간의 시기입니다. 지증왕의 바로 전대 왕이었죠. 지증왕 대에 이르러서는 도읍의 동쪽에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 동시전을 설치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증왕과 관련된 업적이므로 정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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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지우개        비가 그친 후 구름이 산자락에 걸려 있는 모습입니다. 흰 구름이 마치  그림의 한 부분을 지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이 되어 펼쳐지는 그 아름다움에 매번 놀라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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