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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지명유래] 널로 만든 문과 주점 '판문점’

by 행복사냥이 2018. 8. 31.

알아두면 좋은 생활상식 지명유래 편 

판 문 점

 

 

 

Ι 땅 이름  널로 만든 문과 주점 '판문점

 

2018년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지명 중 하나로 판문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판문점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판문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판문점은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위치에 했습니다.(판문점의 실제 위치는 파주 군내면 조산리와 50m, 진서면 어용리와는 70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최근 언론보도에 판문점 행정구역 주소도 서로 달라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저는 통일부가 운영하는 남북회담 본부의 홈페이지 자료를 인용했습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4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 지역에 출몰해 활동하던 조선의 3대 도적, 임꺽정의 활약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몽진을 하던 선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때는 휴전회담이 벌어지던 60여 년 전이었습니다.

최초 휴전협정이 진행되던 곳은 개성이었는데, 회담장소의 중립성 문제로 변경된 곳이 바로 판문점입니다.

당시 널문리라고 부르던 이곳은 콩밭 옆에 초가집 3채와 주막을 겸한 가게 1채가 있던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이 널문리를 중심으로 직경 1km의 원형지역에 천막을 세워 회담을 진행했습니다.

판문점 중립지대       1952년 판문점 중립지대에서 농부들의 사진입니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하늘에서 본 판문점-I     1952년 하늘에서 본 판문점 행정관리 시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곳을 '널문리'라고 불렀던 배경에는 임진강의 지류가 이곳에서 넓게 퍼지는 지형을 이루기 때문에 '넓은 물'의 뜻인 '널물'또는 '널무리'가 변한 이름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다른 설도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평양으로 몽진을 하던 중 임진강에 가로막히자 백성들이 집 문을 부수어 다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널문리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하늘에서 본 판문점-II     1951년 하늘에서 본 판문점 전경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그렇다면 널문리는 어떻게 판문점이 되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판문점 회담장이 들어서기 이전, 이곳에는 주막을 겸한 작은 가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지명을 무엇으로 할까 논의하다가 옛 지명인 '널문이'로 하려 했으나, 회담에 참여한 중국 측의 반대(한글로 표기했을 때 찾기가 불편하다는 이유였다고 하죠.)로 한··중 세 나라 글자로 표기가 무난한 '판문점'으로 결정되었다는 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 '널문'의 한자식 표기인 '판문(판문)'에 가게가 있던 곳이란 의미의 가게 점()자가 붙어 '판문점이라는 지금의 명칭이 탄생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몽진을 해야 했던 선조와 얽힌 판문점의 설화, 그리고 전쟁의 총성을 잠시 멈추게 했던 판문점에서의 기록들.

늘 생각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연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

 

조선의 3대 도적, 임꺽정

임꺽정(1504~1562)은 조선 명종 때의 인물로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도 쓴다.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의 백정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황해도 및 함경도를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도적이 된 명확한 계기나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1559(명종 14)부터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는 설이 있으나, 실록 등의 기록에는 의적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민간 설화에서는 의적으로 많이 묘사되곤 하지만 이는 그저 임꺽정이 평소에 꼴보기 싫던 탐관오리와 부자들을 박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을 것이라 추정한다.)

1560(명종 15)부터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명종 17) 음력 1월에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장길산과 임꺽정을 꼽았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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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분단과 아픔의 상징이 아닌 평화와 변영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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