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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여행

[남원] 조선 판타지 배경 남원 "만복사지"

by 행복사냥이 2018. 8. 17.

나를 위한 힐링여행, 조선의 판타지 배경

남원 만복사지

 

 

 

Ι 남원 "만복사지"

 

전라북도 남원은 인구 20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도시규모에 비해 춘향전의 무대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곳입니다. 춘향이와 이 도령이 거닐었다는 광한루와 미식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추어탕까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남원을 찾고 있지만, 정작 관광객들은 잘 찾지 않는 보물 같은 곳이 남원에 있습니다 

 

천녀유혼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인간과 귀신의 판타지멜로로 주인공이었던 장국영분과 왕조현분이 이 영화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왕조현분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아 ~ 세월차가 느껴지네요.)

이 영화와 같은 판타지멜로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곳이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만복사입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서 만복사지라고 불리는 이곳은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해 있는데 알지 못하는 분은 그냥 잔디밭이라고 느껴질 만큼 조용하고(?) 한적한 곳입니다.

저도 처음에 '왜 이렇게 넓은 잔디밭이 있지?'하고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근데 알고 보니 이곳은 우리나라의 보물이 4점이나 있는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 보물들을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매월당 김시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김시습은 1434(세종 16) 한양 성균관 근처에서 태어났다.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고,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훗날 크게 쓰겠다'라는 칭찬과 비단 30필을 하사받을 만큼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집안 어른이 논어'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는 글귀를 따서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1449(세종 31) 15세 때 어머니를 여의면서 외가에 보내졌으나, 친인의 죽음으로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21세 때인 1455(세조 1)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한 끝에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10년간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자 이들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31세 때인 1465(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는데,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1465) 때부터 37(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평생 유랑과 은거를 거듭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글을 썼으며, 때로는 후학을 양성했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무량사(無量寺)였으며, 이곳에서 1493(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입니다.(일설에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 동으로 만든 높이 35(10m)의 불상을 모신 2층 석탑과 5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 유명한 이 곳은 조선 중기까지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합니다.

 

  [만복사지 전경, 출처, 남원시청]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례 걸친 발굴조사결과 만복사지는 창건 후 몇 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쪽, 서쪽, 북쪽에 각각 금당지가 있는 13금당식의 가람 배치양식의 사찰로 고려시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 구조와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 유구가 남아있어 고려시대의 가람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보물 제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 출처 문화재청]

 

이 석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발굴 당시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징으로는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단순한 구조(고려시대의 불상이나 석탑은 통일신라의 것과 비교하면 그 비율의 균형미가 다소 떨어집니다.)이지만,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다는 것이 독특한 점입니다.

[보물 제31호 만복사지 석조대좌, 출처 한국관광공사]

[보물 제31호 만복사지 석조대좌, 출처 문화재청]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육각형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 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기고 그 위에 연꽃을 조각했습니다.

위쪽 바닥 중앙에는 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파놓은 사방 30cm 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있습니다.

이 석좌는 높이 1.4m 정도인 하나의 돌에 전체를 조각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들이 전형적인 8각형 구조였다면 이것에서 벗어난 6각형이라는 점, 코끼리 눈 모양(眼象) 안에 꽃을 장식한 것 등 고려시대의 유행했던 양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물 제32호 만복사지 당간지주, 출처 남원시청]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 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입니다.

거기에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름을 그렸는데, 당간지주는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고정하기 위해 세운 버팀기둥입니다.

기둥에는 위, 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웠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커다란 돌을 아무런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의 크기를 통해 과거 만복사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물 제43호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광배 뒷면 음각 여래입상, 출처 남원시청]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작품입니다. 부처님 바깥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습니다.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습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등도 아주 원만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독특한 옷깃의 접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둥근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광배(光背)는 머리 광배와 몸 광배가 굵은 선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 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으며, 이들의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듯 느껴지는 신체의 비율과 부자연스러운 옷자락(천의)의 주름을 통해 고려시대의 양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음각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면만 보고 나가시기 때문에 광배의 뒷면에 또 한분의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복사지 석인상, 출처 한국관광공사]

 

만복사지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석인상입니다.

석인상의 형태는 사각형 돌기둥에 3개의 면을 사용해 사람형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은 평평하게 다듬었는데, 다듬은 면에 두 개의 구멍이 확인됩니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는 370cm내외입니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의 창건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고미술19656월호에 보면 이 석인상의 용도가 당간지주와 같은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그 용도에 대해서는 사찰을 수호하는 신장 상 또는 장승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본래 2기의 석인상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발굴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석인상 외의 1기는 머리 부분만 남원 향토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있다고 합니다.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1910년도의 사진을 보면 그 당시에 이미 1기는 몸체와 머리 부분이 분리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99294일자 연합뉴스의 기사에는 특히 당간지주 앞 국도변에 위치한 한 쌍의 석인상은 4점의 보물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유물로 평가되고 있으나 도로가 유실된다는 이유로 발굴은커녕 몸체를 도로에 그대로 묻은 채 포장공사를 해 현재 도로변에 머리 부분만이 돌출돼 있고 또 다른 석인상은 81년 도로포장 당시 몸통은 도로에 묻히고 머리부문만 경내에 옮겨져 있어 당국의 문화재 의지를 의심케 하고 있다.”라는 대목이 있어 본래부터 분리되어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추정한 바로는 보물로 지정된 4점의 문화재와 동 시대에 제작된 석인상이지만 그 관리는 사뭇 다르다는 인식을 받습니다. 한편의 주장처럼 이것이 만약 당간지주라면 고고학적으로도 굉장히 드물고 독특한 사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드린 것 외에도 만복사지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추어탕 한 그릇과 만복사지 답사를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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