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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지명유래] 넓은 들, 그 이름 그대로 '대전(大田)’

by 행복사냥이 2018. 8. 18.

알아두면 좋은 상식

넓은 들, 그 이름 그대로 '대전(大田)’

 

 

Ι 대전, 넓은 들과 이름 그대로

최근 부동산 시장에서 핫한 곳이라면 단연 서울과 세종입니다.

서울은 많은 전문가들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들어 공급의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향후 지속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곳과 더불어 세종 역시 행정수도라는 상징적인 이미지에 스마트시티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더해 좀처럼 부동산 가격의 하락세가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세종의 봄이 도래하기 전까지 충청권의 핵심도시는 대전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입지조건과 교통망이 대전을 더 빠르게 성장시키며 광역시로의 승격과 더불어 중부권의 주요도시라는 상징성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이 대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대전은 30년 전만 해도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지방의 중소도시였습니다.

물론 당시도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로서 지방이라고 무시를 받는 곳은 아니었습니다만, 지금의 모습처럼 잘 발달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충청남도 도청은 홍성군으로 이전했습니다.) 하지만 넓은 들이라는 지명의 뜻대로 그 성장 가능성만은 확실한 곳이었습니다 

대전은 우리말로는 한밭이라고 합니다. ‘크다의 의미를 가진 우리말이니, 말 그대로 넓은 들로 인해 도시가 확장되기 쉬운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명은 우리말 지명이 먼저 발생하고 이를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표기하게 되며, 다시 한자어식 지명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볼 때 대전의 본 이름은 한밭이고 이를 기록할 때 한자식 명칭인 대전(大田)’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전천의 현재 모습, 출처 대전광역시청]

 

대전(大田)이라는 이름이 국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입니다.

한밭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공주의 자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서 대전천은 유성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짐작하기에 대전이라는 이름은 최소 500여 년 전 조선 초기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대전이라는 행정구역의 명칭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마을 이름이거나 이를 딴 시장명 또는 하천명으로만 겨우 나타났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1895대전리(大田里)’라는 리()단위 행정구역 명칭이 처음 등장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을 합치면서 대전군으로 개칭되었고, 그 관할 하에 대전면을 비롯해 12개 면을 두었습니다. 1931년에는 대전읍으로 승격, 4년 후인 1935년에는 대전부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인 1949년에는 대전시로 승격되었고, 1989년에는 대전직할시로, 1995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전직할시에서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 대전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습니다.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보면, 대전지역은 우술군(雨述郡)지역이었는데, 지금의 옥천인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과 접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의해 우술군이 비풍군(比豊郡)으로 고쳐졌습니다 

고려시대의 대전지역은 정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공주목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 위치였습니다.

대전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어 있기보다는 도의 변천에 따라 그 관할과 명칭이 조금씩 변동되는 변두리지역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 고종 32(1895) 지방행정 제도가 개편되기 전까지 큰 변동이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1930년대 대전의 모습, 출처 대전광역시청]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14년 호남선의 개통은 대전이 삼남지역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주요 계기였습니다.

면 단위였던 대전이 회덕군, 진잠군, 공주군의 일부가 합쳐져 대전군이 신설되었고, 현재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을 아우르는 외남면 지역을 중심으로 대전면이 신설되어 지금 현재 대전광역시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 대전은 외형적인 팽창을 계속했습니다. 1931년에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했고, 그 해 12월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으로 확정되었으며, 1915년 겨우 6천여 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1937년에는 4만여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오자(공주지역민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대전은 중부권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1920년대 대전역의 모습, 출처 대전광역시청]

 

역사를 보면 20세기 이전에 대전은 지금과는 그 위상이 너무 달랐습니다.

현재 대전광역시를 이루는 경관의 대부분이 100년 이내에 형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 위상이나 인지도는 미미한 정도였습니다.

대전광역시의 역사는 경부선철도 부설과 대전역이 문을 연 1905년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도로와 철도 등 교통의 발달이 인구의 증가는 물론 대전을 근대도시로 성장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대전은 도로와 철도의 결절지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1980년대 대덕연구단지 조성과 1993년의 세계박람회(Exposition의 앞 네 글자를 따 엑스포라고 했습니다. 꿈돌이와 한빛탑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의 성공적인 개최로 과학도시의 기능, 군사도시의 기능, 정부대전청사로 대표되는 행정도시의 기능이 추가되어 외연적인 확대가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옛 기억이 어우러진 살고 싶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더욱 애정과 관심이 가는 곳이라 조금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대전의 미래 모습에 대해서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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