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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여행

[사찰여행] 도심 속 사찰, 청주 "용화사"

by 행복사냥이 2018. 9. 18.

나를 위한 힐링여행, 도심 속 사찰

청주 용화사

 

 

 

Ι 도심 속 사찰, 청주 "용화사"

업무차 청주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전의 포스팅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청주는 제 인생의 긴 마디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유달리 청주에 대한 관심이 높을 뿐만 아니라 애정도 많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청주에서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우선은 제 취향대로 사찰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흥덕구에 위치한 용화사라는 절입니다.

제가 사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문화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을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문화재를 보고 있으면 아등바등 부대끼며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번민과 갈등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주곤 합니다.

'다 부질없다'는 무욕의 지경을 느끼기도 하고요. ㅋ

 

용화사는 독특하게도 산중이 아닌 도심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서울의 조계사나 봉은사도 도심에 있으니 아주 드문 일은 아니겠네요. ^^)

사실 절 자체는 그리 오래된 절이 아니지만, 불상은 상당히 오래된 특이한 절입니다. 용화사는 대한제국시기인 고종황제 광무 6년(1902)에 창건된 사찰입니다.

용화사 용화보전(미륵보전)        용화사의 미륵보전에 봉안된 불상들은 원래 무심천 개울가 절터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2년(고종 39년)에 현재 용화사의 미륵보전이 완공되면서 칠불의 부처를 미륵보전에 봉안하였습니다. 미륵보전은 1995년 크게 신축하면서 용화보전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용화전의 이명이 미륵전이기도 하니 본존불은 변하지 않은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7위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 보물 제98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용화사의 사적(193310월에 기록한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용화사 건축 1년 전인 조선 광무 3(1901) 내당에서 잠을 자던 엄비가 꿈속에 일곱 미륵이 칠색이 선명한 무지개를 타고 들어와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을 했고, 당시 청주군수 이희복을 통해 무심천 서쪽의 흙속에 묻혀있던 불상을 찾아내고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옮겨 용화사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건강과 축복을 비는 원찰이 되기도 했습니다.

 

용화사 칠불의 과거 모습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에 위치,  흥덕구의 '흥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간행한 '흥덕사'에서 유래한 것이라 그 지명부터 사찰 내음이 풍깁니다.

직지심경 : 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1377년 백운화상이 '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추려 엮은 것을 그의 제자들이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며, 이 책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도 78년이나 앞서 인쇄되어 20019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무심천(無心川) : 금강의 제2지류로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 부근에서 발원하여 청주 시내를 지나 미호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흐릅니다. 청주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흥덕구, 상당구, 청원구, 서원구의 경계를 나타내는데, 신기하게도 그 명칭부터 종교적인 느낌이 납니다.^^

용화사 극락전    용화사의 미륵보전에 보안된 불상들은 원래  개울가 절터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2(고종 39)에 현재 용화사의 미륵보전이 완공되면서 칠불의 부처를 미륵보전에 봉안하였다가 4분의 부처를 2008년 극락전이 신축되면서 그리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용화사 용화보전의 삼불상       사실, 건물 자체도 1902년의 것은 사라지고, 1990년대 ~ 2000년대에 탑과 함께 개축되었다고 합니다. 석탑은 고려식으로 월정사와 비슷하게 만들어 졌고 경내도 그다지 넓지 않으며, 건물도 삼불전과 4~5개의 건물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7체석불의 크기가 큰 것은 5m가 넘어가기에 7체석불을 안치한 삼불전의 규모만큼은 꽤 큰 편입니다. 중층 건물의 천장까지 꽉 차는 석불들이 꽤 장중한 모습입니다.

용화사 극락전의 사불상      7체석불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손모양 등 섬세한 표현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머무르는 중에도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용화사는 이곳 주민들의 삶과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템플스테이 지정사찰은 물론 사찰전문요리가 전수하는 곳이기도 하네요. ^^

용화사 삼성각       삼성각(三聖閣)은 칠성(七星)과 독성(獨星) 및 산신(山神) 세분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으로, 나누어 모셨을 때는 '칠성각(七星閣), 독성각(獨星閣), 산신각(山神閣)'이라 이름으로 불리고 고유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합쳐져 생긴 신앙의 형태입니다.

용화사 범종루        범종루(梵鐘樓)는 종고루(鍾鼓樓) 또는 종각(鐘閣)이라고도합니다. 큰 범종만 매달아 놓은 곳도 있지만 보통 불전사물 또는 법구사물[사법물]이라하여 범종, 법고, 운판, 목어를 매달아 놓습니다.

[참고 : 법당의 유래]

법당은 불교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이나 보살상을 모신 전각을 일컫는 말로 과거에는 법당이라는 말보다 금당(金堂)’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모신 전각을 금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당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금색 신체(金色身)의 부처님을 모신 집이라는 의미로 금당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초기까지는 본존불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을 금당이라고 하였으나, 이후 본존불의 성격에 맞추어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봉안한 경우는 대웅전(大雄殿),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봉안한 경우는 미타전(彌陀殿), 또는 극락전(極樂殿)으로 명명하며 건물의 명칭을 구체화했다고 알려져 있다. ‘법당이라는 용어는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는 내면의 깨달음을 강조했던 선종에 의해 일반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을 만들지 않고 불상도 모시지 않은 법당(여기서는 법문을 설하는 장소를 의미하는 법당의 의미)만 두는 등 선종에서는 금당보다 법당에 큰 비중을 두게 되었는데, 고려 중기 이후 선종이 크게 유행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모신 전각을 총칭해 법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공기 좋은 깊은 산 속의 사찰은 아니었지만, 도심 속에서 중생과 함께하는 용화사를 통해 종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모든 자료의 출처는 청주 용화사와 용화사 홈페이지, 나무위키, 다음백과에서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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