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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여행

[충주] 고구려비가 충주에도 있나요?

by 행복사냥이 2018. 10. 31.

나를 위한 힐링여행, 대제국 고구려의 흔적

충주 고구려비

 

 

 

제국 고구려의 흔적

충주 고구려비

 

 

어느 날 꿈에 충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를 찾아갔던 10년 전의 기억이 나타났습니다.

며칠 전의 기억도 아닌 10년 전의 일이 꿈에 나오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 친인의 결혼식으로 충주를 방문할 일이 생겼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공교롭기도 하고 내친 김에 중원고구려비를 다시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탄금대를 거닐며 산책도 하고 국보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평리 7층 석탑(중앙탑)도 가보고 싶었으나 이리저리 계산을 해 보니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빠듯해 고구려비만 보고 오기로 했습니다

충주고구려비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입니다.(중원고구려비라고 배웠는데...)

오랫동안 천수를 누린 고구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기념비로 추측되는 이 고구려비는 국보 제205로 지정되어 있고, 그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습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유물입니다.

이 비석의 존재가 밝혀지기 전까지 한강 이남의 고구려 진출설을 뚜렷하게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구려비를 통해 실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던 고구려의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 / 출처 문화재청, 위키백과]

 

문화재 보호법 제23조에 따르면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할 수 있고...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령에 따라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큰 것, 제작 연대가 오래되고 그 시대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특히 보존가치가 큰것, 제작의장이나 제작기술이 우수해 그 유례가 적은 것, 형태, 품질, 제재, 용도가 현저히 특이한 것,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등을 대상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국보 지정의 기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비교해 보면 숭례문은 흥인지문보다 제작연대가 400여 년이 앞설 뿐만 아니라 균형미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건축의 전형적인 미를 더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 주심포식에서 조선시대 다포식으로 넘어가는 전통 목조건축의 변화상을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남대문과 동대문이라는 용어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문화재의 가치를 폄하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우리 문화재가 국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1955년부터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34년부터 총독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순으로 번호를 붙여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해 관리했는데, 광복 후 이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에 있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국보'로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일제 강점기 당시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 식민지가 된 조선은 국가가 아니며, 따라서 조선의 국보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우리 문화재를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이어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하면서 1955년에 지정한 국보를 '국보''보물'로 다시 나누어 지정했습니다.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전시관 외부의 모습입니다. 이 전시관이 들어서기 전에만 와본 터라 지금의 모습이 낯설고 생소합니다. 전에 왔을 때는 고구려비를 알리는 보호각만 있었습니다.

 

나라의 중심, 충주까지             

 

고구려의 최전선 마을                전시관 내부에 들어가 보니 고구려비에 대한 설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충주의 위치와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장수왕의 이야기가 많은데, 오랫동안 재위한 이유로 장수왕으로 명명된 이 분은 굉장히 많은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금강 유역까지 진격해 백제를 압박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 영토의 최남단인 충주에 국원성이 설치되었습니다. (충주에 중앙탑이 한반도의 중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앙탑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차지한 영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철의 고장, 충주              충주가 우리나라 3대 철산지라는 사실을 여기서 알았습니다. 또 칠지도의 고향이기도 하다네요. 놀라운 일입니다.

 

고구려 무사             고구려가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등자였습니다. 말을 탈 때 발에 걸어 중심을 잡게 하는 것인데, 고구려의 등자 사용은 서양보다 월등히 앞선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영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디테일이 차이를 만든다고 말처럼 지금에서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 당시에는 강대국의 비결이었던 것이죠.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의 모습입니다.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다듬어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그 형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부터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었고, 현재는 200여 자만이 판독되었었다고 합니다. 각 면에 새겨진 글자들을 쉽게 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석탑이나 불상에서도 그렇듯이 삼국시대 각 나라의 비석에도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

모양에도 차이점이 있지만, 그 다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비석의 서체입니다.

고구려비의 서체가 호방하고 장중한 느낌이라면, 신라의 경우는 소박함, 백제는 세련되고 유려함을 전해줍니다.

 

비석의 내용은 전문적인 부분이 있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이 아니면 머리가 아프거든요.

 

1976년 재건공사(교량)           

1976년 입석마을 전경           

1979년 "칠전팔기 마을" 입석과 함께 놓인 충주 고구려비           

1979고구려비와 주민들           

 

이 충주고구려비에 관한 설화는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옵니다.

마을의 입구에 2개의 돌기둥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토지의 경계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고구려비가 있던 곳의 마을이름이 입석마을입니다.

이후 어찌된 일인지 1972년 이전에는 대장간 자리의 건물 기둥으로 쓰이다가 1972년에 대홍수로 충주 고구려비가 쓰러지자 마을을 다시 재건하면서 고구려비를 바로 세우고 함께 '칠전팔기의 마을'이라고 쓴 비석을 조성했습니다.

고구려비는 그 후 여러해 동안 그 존재가 희미하다가 1979년 평소 문화재를 좋아하던 동호인들이 이 비석을 보고 단국대학교에 제보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훼손된 부분이 많기는 했지만,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심상치 않았나 봅니다.

 

현재 칠전팔기 마을 입석              1976년에 세워져 충주 고구려비와 함께 있었던 칠전팔기의 마을입석의 현재 모습입니다. 고구려비의 그 이름을 찾지 못했다면 아직도 이 비석의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을 겁니다. 본격적인 발굴에 나선 지 며칠이 안 돼 신라의 비석으로 생각했던 것이 고구려의 척경비임이 밝혀지고 홀대받던 고구려비는 비석 보존을 위해 마을창고로 고이 모셔집니다. 그리고 1981년 국보로 지정됨과 함께 보호각을 건립하고, 이후로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천년의 세월을 품고 있던 충주 고구려비는 그렇게 그 본래의 가치를 되찾았습니다.

 

제가 문화재를 좋아하고 즐겨 찾는 것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 담겨있는 삶의 흔적들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이곳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오시면 그 재미있는 삶의 흔적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문화해설사 분들도 계셔서 더 쉽게 역사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탄금대도 좋지만 충주에 가시면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도 꼭 가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모든 자료의 출처는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소개 자료와 문화재청 홈페이지, 위키백과 등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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