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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여행

[청주] 청주에도 센트럴파크가 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11. 17.

나를 위한 힐링여행, 청주 역사를 품다.

청주 중앙공원

 

 


 


주의 역사를 간직한 곳

중앙공원


지난번 용화사에 이어 청주의 문화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포스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벌써 몇달 전인데,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 보니 이제야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청주의 센트럴파크,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중앙공원 내의 문화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국과 청주의 센트럴파크 사이에는 큰 차이점들의 있기는 하지만 아메리카의 센트럴파크 마냥 청주의 중앙공원도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물론 그 연령층에서 극심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청주 중앙공원을 소개하자면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옛 관아터로 청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보로 지정된 용두사지 철당간과 동헌을 이웃하고 있는 중앙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의 주역이었던 조헌, 영규, 박춘무의 3대 기적비와 흥선대원군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척화비(斥和碑) 등 50여 개의 비석들은 물론 고려말 충신들을 구해냈다는 전설이 서린 수령 900여 년을 헤아리는 압각수, 고려시대 관아 부속건물이던 망선루, 충청 병마절도사영문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구석구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중앙공원은 그 말 그대로 청주 도심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근의 상당공원과 같이 청주시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중앙공원의 가까운 곳에 홈플러스가 있어 그곳에 주차를 하고 중앙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중앙공원 인근은 구도심이라 오래된 맛집들이 아직도 구석구석에서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 맛집을 소개하겠습니다.^^)     


망선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망선루



망선루는 본래 고려시대 청주 관아의 객사 동쪽에 있던 누각 건물로 취경루라고 했습니다.

청주에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기록에 보면 고려 공민왕 10년에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궁궐로 돌아가다 청주에 머무른 기념으로 과거를 치렀는데, 이때 합격자의 명단을 취경루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 세조 7년(1461년) 목사 이백상이 중수하고, 한명회가 누각의 이름을 고쳐 망선루로 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습니다.

현재의 망선루는 2000년, 현재의 자리에 옛 모습으로 이전 복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척화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


 

망선루의 오른편에는 작은 비석이 있습니다. 글자의 흔적이 희미해 많은 분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이 비석이 바로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척화비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고종 8년(1871년)에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입니다. 비문에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의 12글자가 새겨져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의 척화비는 그 글자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들은 얘기로는 인근의 학생들이 탁본을 하는 과정에서 그 훼손의 정도가 심해졌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간 틈에 일본 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중앙공원의 척화비도 버려져서 청주 석교동 하수도 뚜껑으로 쓰던 것을 197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 합니다.     



옛 청주방송국 자리        충북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를 송출한 청주방송국이 있던 자리


 

척화비의 오른편 담장 너머가 충북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를 송출한 청주방송국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1957년부터 1978년까지 이곳에서 청주방송국이 운영되다가 현재는 KBS청주방송총국으로 발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압각수        나뭇잎 혹은 그 뿌리의 모양이 오리발에 가깝다고 해서 '압각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려시대 청주목의 객사문 앞에 있었던 나무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압각수'입니다.

'압각수'라는 이름은 나뭇잎 혹은 그 뿌리의 모양이 오리발 모양에 가깝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으로 이 나무의 수령은 무려 900여 년이라고 합니다.


이 압각수와 관련된 이야기로는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이색, 권근 등 10여 명이 이성계의 반대파로 지목되어 청주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큰 장마로 죽음의 위기가 닥쳐오자 이 나무에 올라가 살아났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        병마절도사가 군사 업무를 주관했던 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


 

사진의 건물은 청주읍성 안에 있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입니다. 이 곳 안쪽의 병영에서 종 2품의 병마절도사가 충청도의 군사 업무를 주관하였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청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자 효종 2년(1651년) 충청남도 해미에서 병영을 옮겨왔다고 합니다.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


 

이 곳은 고려시대 청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던 용두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사찰의 건립과 함께 많은 수의 당간이 세워졌는데, 현재는 대부분 당간은 사라지고 당간을 받치고 있던 지주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히 이 용두사의 철당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본래 이것도 둥근 철통 30개를 연결해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는 20개만이 남아 있는 형편입니다. 


당간의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철당기에는 당간을 세우게 된 내력과 건립 연대, 건립에 관여한 사람들이 관직명이 적혀 있어  당시 지방경영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철당기의 끝에는  준풍 3(962년)에 주성하였다고 하여, 고려 광종 때 사용했던 독자 연호를 실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철당간을 중심으로 지난 수백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당간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듭니다.     

많은 부분을 소개해 드리지는 못했지만, 청주의 중앙공원에는 볼거리가 다양합니다. 물론 관심이 있고 아는 분들만 아는 볼거리입니다. (척화비와 철당간의 사진을 찍는 도중에 이게 뭐길래 사진을 찍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센트럴파크하면 저 태평양 건너에 있는 공원보다 이곳 청주의 센트럴파크, 중앙공원도 떠올려 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으로 이번 포스팅을 준비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 그럼 다행입니다.^^


모든 자료의 출처는 중앙공원에 있는 문화재 소개자료와 지자체의 홈페이지, 위키백과 등을 참고했습니다.

각 포털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구글+에서 '행복사냥이'검색하시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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