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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한국사 능력시험] 42회차 문제와 풀이분석(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9. 4. 26.

우리역사 길라잡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한국사 능력시험 42회차 문제분석

#오늘은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왕'의 업적을 묻는 문제는 대개 그 왕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의 내용이 제시가 됩니다. 이 문제에서 제시된 「삼국사기」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단어는 '신라의 대야성', '성주 품석'입니다.

현재의 합천을 말하는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은 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입니다. 김춘추는 지나 번 문제를 통해 언급한 사실에서 보면 나당 연합을 이끌어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후에 진골계의 무열왕으로 등극을 합니다.)그렇다면 지문이 나타내는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왕'이라는 인물은 백제의 의자왕입니다. 의자왕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해동증자'라는 칭송을 들은 인물입니다. 또한 용맹하고 결단력이 있어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해 40여 성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노래를 통해 '삼천궁녀와 의자왕'이라는 불명예로 기억되고 있지만, 실상 그가 가진 재능이 뛰어났던 왕으로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삼천궁녀의 이야기가 과장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방송에서도 언급이 된 바가 있습니다. 알쓸신잡에서도 이 부분을 설명한 적이 있죠.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의자왕과 후궁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 근거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삼국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백제의 당시 인구를 추산했을 때 3000면의 궁녀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하죠. 유시민 선생의 말처럼 신라와 당나라 연합이 정당화되기 위해서 의자왕은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던 나쁜 왕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것일 수 있습니다. 패자가 승자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는 굴레를 안고 기록된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죠. 

1.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의자왕 전대 왕이자 그의 아버지였던 무왕의 업적입니다. 무왕은 서동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무왕의 출생지가 익산으로 추정되는데, 왕권 강화와 왕권의 건재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며 그곳으로 천도를 하려 했으나 실패를 했습니다. 

2.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백제의 26대 왕인 성왕의 업적입니다. 성왕은 불교의 전륜성왕을 자처하여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사상적으로 불교를 적극 활용한 인물입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한성 유역을 빼앗기자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해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후에도 고구려의 공세적인 세력 확장을 저지하지 못하고 성왕 시기에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습니다. 이는 기존 웅진 지역의 토착세력과의 결별과 '부여씨'의 결속력 강화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사비 지역은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교통로 상으로 중요한 요지였고, 특정한 세력이 없는 미개발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 왕권의 안정은 물론 새록운 국가 건설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비천도를 통해 백제 중흥을 염원했던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나, 비밀리에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한 신라의 배신으로 다시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매복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강 유역을 빼앗기며 괴롭게 죽음을 맞이하며 (개로왕)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이제 다시 흥해보자고 일어서니 그때의 왕이 바로 성왕입니다.

3. 수와 외교 관계를 맺고 친선을 도모하였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이 심한 경우, 대개 중국이나 타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신라나 백제나 마찬가지였죠. 수와 외교 관계를 맺고 친선을 도모한 것은 시기적으로 볼 때 신라 선덕여왕 전대 왕인 진평왕의 시기입니다. 원광법사를 수나라로 보내 이를 토대로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4.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다는 것은 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대국가의 전성기는 누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전성기라고 하면 떠오르는 왕은 근초고왕입니다.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불리우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5. 계백의 결사대를 보내 신라군에 맞서 싸웠다.

 영화와 드라마에 여러 차례 주인공으로 소개된 백제의 계백장군입니다. 영화 '황산벌'에 보면 계백장군과 김유신 장군의 모습이 나옵니다. 백제와 신라의 흥망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한 일이죠. 결국 황산벌 전투의 결정적 패배를 바탕으로 백제는 멸망하였으니,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죠. 그래서 이 예문이 의자왕의 시기와 연관지을 수 있기 때문에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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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조명        깊은 밤 밝게 빛나고 있는 조명을 찍을 사진입니다. 때로는 흔들리는 모습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고민하며 인생의 굴곡을 거쳐온 사람이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이보다 더 많은 지혜를 품고 있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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